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생애 (문단 편집) == 나치당의 집권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itler portrait.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s_Lebe_Deutschland.jpg|width=100%]]}}}|| || 히틀러의 초상화 || '''Es Lebe Deutschland![br]독일 만세!'''[br][[프로파간다]] 포스터 || >'''Unsere letzte Hoffnung: HITLER''' >'''우리의 마지막 희망, 히틀러''' >----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의 포스터 문구. >'''오늘로 [[히틀러]]는 독일의 전부가 되었다.''' ” 8월 4일자 신문 머리기사 제목은 그렇게 나갔다. …… 8월 초에 히틀러가 일으킨 조용한 쿠데타는 8월 19일에 관례로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승인을 받았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투표자의 89.9퍼센트가 히틀러에게 국가 수반, 정부 수반, 당 지도자, 군 통수권자로서 무제한에 가까운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하는 데 찬성했다. …… [[장검의 밤|룀 사건]]에서 [[힌덴부르크]]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몇 주 동안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흔들 수 있는 모든 위협 요인을 남김없이 제거했다. 마침내 지도자국가가 확립되었다. 독일은 독재 권력을 만들어주고는 거기에 손발이 묶여버렸다. >---- >히틀러 평전 1권 12장 절대 권력(730쪽) > [[히틀러]]의 총리 취임은 나치 신화에서 '민족 봉기일'로 당장 미화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이제부터 열린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심지어 달력을 바꿀 생각까지 했다고 나중에 히틀러는 주장했다. 히틀러는 또 '권력 장악'이라는 말을 쓰면 [[쿠테타]]를 연상시킨다면서 합법적 경로를 거쳐서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권력 인수'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고 나치 대변인들도 그런 식으로 용어를 바꾸어 썼다. 사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고 대통령이 전임 총리를 임명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히틀러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약속이나 한 듯이 여기저기서 열렬한 박수 갈채를 받으면서 히틀러와 나치당 간부들은 날아갈 듯이 기뻤고 그것은 이번의 권력 이양이 여느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이날 벌어진 일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가를 오해하거나 오판한 사람은 하루도 못 가서 뼈저리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것이다. 1933년 1월 30일 이후로 독일은 예전의 독일이 아니었다. > >그 역사적인 날은 종말이면서 출발이었다. 아무도 슬퍼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이 시효를 다한 날이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린 총체적 국가 위기가 절정에 이른 날이었다. 그런가 하면 히틀러의 총리 취임은 전쟁과 대량 학살의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독일이라는 민족국가를 망가뜨리는 과정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억누르는 제동 장치를 하루아침에 훌훌 벗어던지고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마이다네크]] 같은 [[강제수용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나치]]의 끔찍한 살육이 막 시동을 건 날이었다.''' >---- >히틀러 평전 1권 (p. 611~612) 세계대공황과 막대한 전쟁배상금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건국을 주도했던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들은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국민들의 지지는 점차 좌우의 양 극단에 위치한 정치 세력에 몰리기 시작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의 경제는 휘청거렸다. 1920년대 독일 경제는 휘청거렸다고 할 수 있는데, 1920년대 독일 경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에 직면했었다. 전쟁 전 단 1마르크가 601만 4,300마르크로 평가절하되고, 달걀 1개의 값이 3천만 마르크가 됐고, 200조 마르크 지폐는 800달러 정도면 환전이 가능했다. 이렇게 독일 경제는 인플레이션을 직격타 맞았었다. 당시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런 실업문제를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갔는데, 그런 노력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을 맞이하면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과정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은 기존 중도우파 유권자들의 표를 대거 흡수하며 [[극좌]] [[공산당]]에 대항하는 [[극우]] [[민족주의]]의 대표 정당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지지율도 [[1928년]] [[총선]]의 2.6%에서, 대공황 언저리의 [[1930년]] 총선에서 18.3%로 급격하게 상승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으로 도약하기에 이르었다. 이 자신감으로 1932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본래 히틀러는 더러운 바이마르 공화국에 영합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출마할 생각이 없었으나 [[파울 요제프 괴벨스|괴벨스]]가 설득해 출마했다고 한다. 이 때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국적을 포기했으나 정작 독일 국적은 바로 취득하지 못해 사실상 무국적자나 다름 없어서, 1932년에 [[나치당]]이 연정으로 참여한 브라운슈바이크 지방정부의 '공무원'으로 취직하는 꼼수로 독일 국적을 취득한다.[* 당시 국적법에서는 독일의 공무원이 되면 독일로 귀화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법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했다.] 그렇게 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쟁영웅 힌덴부르크의 지지율이 압도적이어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낮았지만, 히틀러가 36.7%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하여 파란을 일으켰다.[* 힌덴부르크가 53%의 득표율을 얻었고 공산당의 [[에른스트 텔만]]은 10%였다. 1차 투표에선 히틀러 30% 힌덴부르크 49% 텔만 13%.] 한편 의회 지지 없이 대통령 신임으로만 유지되던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은 1932년 5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신임을 거두면서 붕괴했다. 그 뒤로 총리가 된 인물은 [[프란츠 폰 파펜]]으로, 잘 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아첨하는 것밖에 없는 한심한 인간이었으나 정치군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배후에서 조종할 목적으로 총리로 추천되었고 그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파펜은 반공화국 왕당파 반동주의자로써 총리가 되고 나서부터 온갖 실책을 저질렀고, 자기 정당인 [[가톨릭 중앙당]]과도 대립한 끝에 쫓겨나는 굴욕을 당해 의회 내 지지세력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펜은 파펜 내각에 대해 유일하게 모호한 태도를 보였던 나치당과 히틀러에 지지를 호소했고, 히틀러는 사방에서 욕먹는 파펜을 거부하는 대신 돌격대 활동 금지 명령 해제와 의회 해산(총선거)을 조건으로 파펜 내각을 지지해주기로 했다. 이 때 나치당 내부에서도 파펜 따위에게 협조하면 안된다며 반발했지만, 히틀러는 도박을 벌였다. 그렇게 열린 1932년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4%로 230석으로 원내 1당으로 등극했다. 히틀러는 총선 전 약속을 뒤집고 파펜에게 총리직을 요구하지만 파펜과 힌덴부르크에게 거부당했고, 나치당은 공산당이 발의한 파펜 내각 불신임안에 다른 정당과 함께 찬성해 복수한다. 이로 인해 벌어진 의회 재해산으로 인한 11월 총선에서, 33.1%로 지지율은 내려갔지만 196석으로 원내 1당은 유지한다. 그러자 보수파에서는 히틀러를 끌어들여 대보수연합정부를 구성하려고 계속 시도하지만, 총리자리를 요구하는 히틀러와 히틀러의 총리 부임을 반대하는 대통령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일단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는 거부하고 파펜 경질에 큰 역할을 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을 대통령 내각[* 과반수에 미달시 헌법상 대통령 권한에 임명된 내각.]의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프란츠 폰 파펜|파펜]], 마이스너 등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해야 한다고 힌덴부르크를 설득해 히틀러가 총리, 파펜이 부총리, 그 외 독일 국가인민당의 내각 참여를 골자로 한 내각 구성 합의를 이루었다. 이렇게 되니 의회 지지세력 없이 대통령 신임으로만 유지된 슐라이허 내각은 무너졌고,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에 정권을 '''합법적으로''' 얻어낸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013100209101001&officeId=00020|히틀러의 집권을 알리는 1933년 1월 31일자 동아일보]] 집권 과정은 히틀러와 나치당 뿐만 아니라 독일 정치권의 무수한 병림픽이 난무했는데 구체적인 과정과 비하인드 스토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프란츠 폰 파펜]],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항목 참조. 히틀러가 집권하고 절대권력을 구축한 건 히틀러 특유의 직관적 정치력과 벼랑끝 전술도 한 몫 했지만, 좌우파를 막론하고 나치당과 히틀러를 견제해야 할 경쟁 정파들이 히틀러와 나치당의 잠재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1930년 총선에서 제2당으로 급격히 성장하자 사회민주당의 일부 논객들은 히틀러의 집권은 보수진영의 무능을 드러내 사회주의 독일로의 역사 이행을 한 층 더 앞당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산당도 비슷하게 생각한건 매한가지라서 사민당을 견제하며 지지기반을 흡수하는데 집중했다. 결국 공산당과 사민당은 나치에 대항하는 단일전선을 짜는데 실패하여 결국 권력을 나치에게 넘겨준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당시 주류였던 독일의 중도 우파 역시 나치와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였다. 보수파는 국민의 지지가 높은 나치당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방패로 삼고, 히틀러는 잘 달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일장춘몽에 불과하였다. 1933년 1월이 아니라 그 전에라도 히틀러를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1923년 쿠테타를 일으켰을 때 중형을 선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만 놓쳐버렸고, 그나마도 몇 달도 안 돼 가석방으로 석방되어 히틀러는 다시 정치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대 초반 치솟는 지지율과는 대조되게 당시 나치당은 거듭된 선거로 돈이 부족했는데, 1932년 11월 총선에서 득표율 상승세가 꺾이자 위기의식은 한층 더 커졌다. 나치당의 40만 돌격대를 먹여 살리려면 한 주에 나치당서 250만 마르크씩 빠져나가는데 돈이 없어서 돌격대 대원들이 앵벌이를 하고 다니는 지경이었다. 나치당을 지지하는 독일인들도 이 때에는 '체제 절멸하라고 표 줬더니 자리다툼이나 한다'라며 나치당에 불만을 보였다. 역사가들은 이 때가 나치당의 독재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평가를 하고는 한다.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정질서를 공공연히 거부하거나, 묵인할 뿐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들의 합의로 히틀러는 총리가 되었다. 히틀러와 나치당의 집권은 사회민주당 등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키려는 자들의 히틀러에 대한 과소평가와,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기를 거부한 정치 집단의 계산 착오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1933년]] 3월에 대통령이 새 내각에 힘을 실어주려고 의회해산권을 행사해 새로운 총선이 예정되어 있었다. 때마침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히틀러 정부가 마음에 들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그가 제안한 기본권 제한에 동의했고, 이를 통해 공산당을 무력으로 때려잡고 선거에는 관권을 동원해 공산당의 참여를 방해했다. 그럼에도 총선에선 44% 득표로 단독 과반수 확보엔 실패했다. 히틀러는 나치만으로 과반의석을 달성하지 못하자, 의회 내 비나치 우파와 타협해 입법권을 행정부에 수여하는 '''[[수권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순간이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최후였다. 그리고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독재자가 독일에서 탄생했다.'''[* 사실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0년부터 의회를 무시한 헌법상 대통령 비상대권인 대통령 내각출범 때부터 이상해졌으며 대놓고 공화국에 적대적이었던 파펜과 군 장성 슐라이허가 총리라고 나올 때부터 이미 의회주의는 끝났다.] 이후 히틀러는 지방의회를 해산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여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은 불법 정당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각종 단체와 조합들은 나치당의 하부조직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나치 독일|독일 제3제국]]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